러시아 두브나(JINR)와 일본 RIKEN의 초중원소 발견 경쟁
이번 편은 러시아 두브나 합동핵연구소(JINR)와 일본 RIKEN의 초중원소 발견 경쟁에 대해 알아보겠다.
과학의 발전은 단순한 기술 축적을 넘어, 국제적인 경쟁과 협력의 장으로 전개되어왔다. 특히 원소 발견과 명명권을 둘러싼 초중원소 연구는 국가 과학 역량의 상징이자, 세계 과학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영예로운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그 중심에는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두 국가가 있다. 러시아는 두브나 합동핵연구소(JINR)를 중심으로 초중원소 연구에서 오랜 전통을 이어오고 있으며, 일본은 RIKEN을 기반으로 아시아 최초로 원소를 공식 발견한 국가로 기록되었다. 이 글에서는 러시아와 일본이 어떻게 초중원소 연구에서 경쟁하고 협력해왔는지, 그 배경과 주요 성과, 그리고 과학적, 외교적, 철학적 의미까지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두브나(JINR)와 러시아의 초중원소 연구 역사
러시아는 냉전기부터 핵물리학 분야에서 선두주자 중 하나였다. 특히 두브나 합동핵연구소(Joint Institute for Nuclear Research, JINR)는 1956년 설립 이후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초중원소 발견 실적을 기록한 연구기관이다. JINR는 104번 원소 루더포듐부터 118번 오가네손까지, 여러 원소의 발견에 핵심적인 기여를 해왔다.
두브나의 성공은 강력한 실험 기반에 있다. JINR는 고성능 가속기인 U-400과 고감도 검출기 시스템을 통해 칼슘-48을 빔 입자로 사용하여 다양한 무거운 원소와 충돌시키는 방식으로 새로운 원소를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실험 방식은 다른 국가보다 훨씬 빠르고 안정적으로 초중원소를 합성할 수 있게 했으며, 이는 오가네손(118번)의 공식 발견으로 이어졌다.
러시아는 초중원소의 명명권 확보에서도 적극적인 전략을 펼쳤다. 실제로 ‘모스코븀(Moscovium, 115번)’, ‘테네신(Tennessine, 117번)’, ‘오가네손(Oganesson, 118번)’ 등은 러시아 과학계와 연계된 명칭이다. 이는 단순한 과학적 업적을 넘어서, 국가적 상징 자산으로서의 원소 이름 확보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는 초중원소를 통해 과학계에서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으며, 과거 핵 기술의 전통을 새로운 과학 영역에서 계승하고 있다.
일본 RIKEN의 도전과 113번 원소 발견
한편, 일본은 러시아보다 훨씬 나중에 초중원소 연구에 뛰어들었지만, 113번 원소 ‘니호늄(Nihonium)’의 발견을 통해 세계 과학사에 독자적인 발자취를 남겼다. RIKEN(이화학연구소)은 2000년대 초반부터 초중원소 합성 실험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며, 특히 2004년부터는 비스무트-209 타깃과 아연-70 빔 조합을 활용하여 113번 원소 합성에 도전했다.
이 실험은 기존의 칼슘-48 기반 실험과는 접근 방식이 달랐으며, 생성 확률이 극도로 낮은 조건에서 수천만 회에 이르는 반복 실험을 통해 극히 드문 합성 사례를 포착하는 방식이었다. RIKEN은 2004년, 2005년, 2012년에 걸쳐 총 세 번의 독립적인 실험 결과를 통해 동일한 붕괴 패턴을 확인했고, 이를 바탕으로 IUPAC의 승인을 요청했다.
그 결과, 2016년 IUPAC은 RIKEN의 실험을 공식 승인하며, 일본은 아시아 최초로 원소 명명권을 획득한 국가가 되었다. '니호늄'이라는 이름은 ‘일본’을 뜻하는 '니혼(日本)'에서 유래했으며, 이는 일본 과학계에 큰 자긍심을 안겨주었다. RIKEN의 성공은 단지 과학적 쾌거가 아니라, 국가 차원의 장기적 투자와 기술력의 총합이 만들어낸 상징적인 승리였다.
경쟁 속 협력: 공동 실험과 국제 과학 외교
러시아와 일본은 초중원소 분야에서 경쟁 관계이지만, 동시에 여러 프로젝트에서 공동 실험과 기술 공유를 진행해왔다. 특히 115번, 117번 원소의 발견 과정에서는 JINR와 RIKEN이 각각 타깃 물질과 빔 입자를 제공하거나, 검출 장비를 공유하면서 국제 협력의 모델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117번 테네신의 발견에는 미국 오크리지 국립연구소가 타깃 원소인 버클륨-249을 제공하고, 러시아 JINR가 가속기를 운용했으며, 일본 측이 데이터 분석 과정에 참여하는 형태로 3개국 협력 시스템이 구성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초중원소 합성이 단일 국가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며, 고도의 과학 외교와 자원 네트워크가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러시아와 일본은 핵이론, 계산화학, 붕괴 패턴 해석 등 이론 기반 분야에서도 공동 세미나를 개최하며 연구자 간 정보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이는 초중원소 분야가 경쟁과 동시에 협력을 전제로 하는 복합적 국제 과학 체계임을 보여준다. 실제로 IUPAC은 단일 국가의 발견 주장을 쉽게 승인하지 않으며, 여러 기관의 독립적 검증과 국제적 공인 절차를 요구한다.
과학기술력의 상징, 초중원소와 국가 전략
초중원소 발견은 단순한 실험실 연구가 아니다. 이는 국가 과학기술력의 정점에서만 가능한 고난도 작업이며, 각국은 이를 통해 과학 외교적 위상, 기술 자립도, 국제 학문계 내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한다. 러시아와 일본의 경쟁은 이런 측면에서 더욱 중요성을 가진다.
러시아는 구소련 시절부터 유지해온 핵물리학 전통과 고급 인프라를 바탕으로 초중원소를 ‘과학 자주성’의 상징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미국과의 경쟁에서 독립적인 과학 노선을 강조하는 도구로 삼고 있다. 반면 일본은 기술 기반 국가로서 과학적 신뢰성과 정확성을 강조하며, 장기 실험과 반복 검증을 통해 점진적인 성과를 추구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특히 RIKEN의 경우, 초중원소 실험에 대한 장기적 정부 지원과 대학-연구소 간 협업 구조가 매우 탄탄하게 구축되어 있으며, 이는 선진국형 과학 생태계의 모델로 평가받는다. 따라서 일본의 113번 원소 발견은 단지 1개의 원소 확보가 아니라, 아시아 과학계가 독자적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이처럼 초중원소 연구는 과학의 영역을 넘어, 국가 전략·기술 리더십·정치 외교까지 포괄하는 총체적 경쟁의 장이며, 향후 119번 이후의 원소 발견에서도 이러한 국가 간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미래의 경쟁 구도와 과학의 공동 진보 가능성
현재 러시아와 일본 모두 119번과 120번 원소의 합성을 목표로 실험을 지속 중이며, 각국의 연구소는 새로운 타깃 물질 개발, 가속기 개량, 검출기 정밀도 향상 등을 통해 다음 발견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역에서의 진보는 단기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십억 번의 시도 중 하나의 성공이 나올 수 있으며, 그 과정은 수년에 걸쳐야 가능하다.
양국은 서로 다른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러시아는 고속 다중 충돌 실험을 통해 높은 빈도의 이벤트를 확보하려 하고 있으며, 일본은 단일 충돌에 대한 정밀한 검출 및 분석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이는 기술 철학의 차이를 보여주는 동시에, 향후 국제 공동 연구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초중원소 연구는 단독 경쟁으로는 한계에 부딪히는 영역이며, 공동의 기술 교류와 자원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분야다. 러시아와 일본의 경쟁은 과학계 전체의 발전에 긍정적인 자극이 될 수 있으며, 두 국가가 협력을 통해 다음 원소의 발견에 성공한다면, 이는 21세기 과학의 이상적 모델이 될 것이다.
결론
러시아와 일본은 초중원소 분야에서 각자의 과학적 철학과 기술 기반을 바탕으로, 인류가 물질의 극한을 탐색하는 과정에 깊이 참여해왔다. 러시아는 두브나를 중심으로 고출력 핵합성 실험과 풍부한 실험적 노하우를 통해 수많은 원소를 발견했으며, 이는 과학기술 전통의 계승이자 자국의 연구 인프라를 활용한 전략적 성과였다. 반면 일본은 장기적인 정밀 검증과 이론-실험 융합을 통해, 세계에서 유례없는 조건 하에서 113번 원소를 독자적으로 발견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는 아시아 최초의 원소 명명이라는 상징적 결과를 이끌어냈고, 일본 과학계의 기술 자립성과 끈질긴 실험 문화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두 나라의 경쟁은 격렬하지만, 단지 승패를 가리는 게임이 아니다. 초중원소는 전 지구적 자원과 기술, 이론을 요구하는 과학 분야이기에, 경쟁은 곧 협력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117번 원소 발견에서 보듯, 타깃 제공국, 가속기 운영국, 데이터 분석기관이 국제적으로 역할을 분담하는 다국적 과학 생태계가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협력 구조는 119번과 120번 원소 발견을 위한 핵심 기반이 될 것이며, 미래 과학이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지식 네트워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초중원소 경쟁은 단지 새로운 원소 하나를 얻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각국의 과학 시스템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일관된 전략을 가지고 있는지, 연구자들이 얼마나 끈기 있게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는지를 가늠하는 지표이자, 과학 외교의 실천 무대이기도 하다. 기술, 자원, 인재, 협력 네트워크의 완성도가 집약된 이 분야는 단순한 실험을 넘어 국가의 과학 철학과 비전이 녹아 있는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향후 8주기 원소가 실험적으로 확인되고, 주기율표가 또 한 번 확장되는 순간이 온다면, 그 성과는 분명 러시아와 일본을 포함한 국제 과학공동체 전체의 협력 결과가 될 것이다. 초중원소는 물리적 한계 너머에 있는 세계를 여는 열쇠이며, 그 발견 과정은 인류가 과학을 통해 어떤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과정이다. 경쟁과 협력을 오가며 새로운 원소를 찾아가는 이 여정은, 지금 이 시대의 과학이 단순한 지식의 축적을 넘어 문화이자 전략이며, 인간 지성의 집단적 도약임을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